피셔-디스카우 - 단 한장의 소장 음반!!
5월 28일 80주년 생일을 맞는 바리톤 레전드 피셔-디스카우에 대한 DG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정음반!
지난 80년간 DG 진정한 정통 바리톤으로 성악 파트의 상징적 존재로수많은 레코딩을 남긴 피셔-디스카우의 최초이자 최후의 베스트 컴필레이션 클래식의 DS&V 시리즈 2CD+1DVD 디럭스 팩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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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셔-디스카우
음악에게
당신 자신의 목소리보다 더 잘 아는 목소리
피셔-디스카우가 뭔가 중요한 것을 알지 못하고 노래하는 경우를 만나본 일이 없었다. 알아야 감정이 생긴다. 여기서 이분법은 적용되지 않는다. 지성과 감성은 하나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피셔-디스카우가 그의 긴 생애 동안 그렇게 잘 그렸던, 품위 있는 유럽문화의 뚜렷한 징표다. -J.B.스틴 “세기의 가수들”에서
이 말을 통해 존 스틴(John Steane)은, 빈틈없는 영국 비평가 힐러리 핀치의 말을 인용하여, 왜 피셔-디스카우가 다른 어떤 연주가보다 “20세기 성악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까”하는 점, 그리고, 비평가 이반 나겔이 썼던 유명한 말처럼, 왜 우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와 함께 삶의 절반을 보냈는가”, 그가 없다면 살면서 많은 것을 덜 경험했을 것이라고 얘기했던 이유를 간결하게 요약해준다. 심지어, 개인적 견해로 보면, 1960년대와 70년대 캘리포니아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품위 있는 유럽 문화”의 전초지에서도, 피셔-디스카우는 우리를 슈베르트, 슈만 그리고 후고 볼프의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멜로디의 영감으로 채색된 순수한 독일 언어의 소리를 사랑하는 애호가들 안으로까지 데려가 주었다. 부분적으로는 가끔 샌프란시스코 리사이틀을 통해, 하지만 대부분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의 작품 속 톰 리플리(Tom Ripley)처럼, 우리가 열심히 모으고 강박관념에 빠진 듯 들었던 그의 음반들을 통해, 피셔-디스카우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보다 더 잘 아는 목소리가 되었다.
그는 1925년 5월 28일 베를린 근교 젤렌도르프에서 태어나,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를 끊임없이 암송하였고, 아홉 살에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으며, 16세가 되자 어머니의 반 강요에 의해 훌륭한 바흐 가수였던 게오르크 발터한테 성악 레슨을 받았다. 6년 후, 피셔-디스카우의 어머니한테 편지하면서, 발터는 사적인 자리에서 아들이 노래한 바흐 칸타타에 대해 충분한 긍지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레슨하면서 아드님과 함께 겪고 토론했던 모든 것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횡경막을 올바르게 지지하는 방법, 놀랍도록 둥글게 울리는 방식, 피아노에서뿐만 아니라 포르테에서도 미학적으로 고운 소리를 내기, 높은 음을 위해 머리끝에서부터 잘 혼성하는 방법, 소리를 앞으로 밀어내기 위해 입천장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 소리의 색채감에 대한 감각을 미적으로 정교하게 선택해 익히는 것, 그리고 음악성 같은 것 말입니다!”
1942년에, 그는 베를린 고등음악원에서 헤르만 바이센보른(Hermann Weissenborn)한테 성악을 더 배웠고, 젤렌도르프 홀에서 첫 공개 리사이틀을 열었는데, 그 연주회는 공습경보에 의해 중단된 슈베르트의 <겨울여행>을 노래했을 때만큼이나 의욕에 차 있었다. 이듬해 그는 고등음악원을 졸업하고 독일군 복무를 요청 받았다. 하지만 1945년 5월 미군들한테 체포된 그는 북 이탈리아의 POW캠프에서 2년을 보냈다: “그 기간 초반에는 거의 야외에서 보냈는데, 그때 나는 따분해하고 제대로 먹지 못하는 동료 포로들을 위해 반주 없이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나는 모래로 채워진 카드보드 위에 서서 밤하늘을 향해 고함치듯 노래를 불렀다. 이 시기에 나는 <시인의 사랑>과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를 포함해 아주 많은 작품을 알았다.
1947년 석방된 후 다시 바이센보른 선생을 찾아 가서 노래공부를 더했고, 베를린 리아스(RIAS)방송에 처음 출연한 일을 포함해서, 콘서트와 리사이틀을 열기 시작했고, 다시 한번, 그의 경력동안 그 어떤 작품보다 더 많이 불렀던 작품인 슈베르트의 겨울여행(CD1 18 - 19)을 노래하기도 했다. 1948년에 그는 베를린 시립 오페라와 계약을 맺고 페렌츠 프리차이가 지휘하는 베르디의 <돈 카를로스> 공연에 포사(Posa)역으로 데뷔했다. 프리차이는 피셔-디스카우의 많은 중요한 오페라 출연과 레코딩에 함께했던 지휘자였다. 프리차이가 죽은 후에 피셔-디스카우는 “그 위대한 음악가와 만났던 것, 그의 여행에 잠깐이나마 동행했던 일은 그저 감사하기만 해야 할 선물이었다.”고 말했다.
1949년에 피셔-디스카우는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녹음을 시작했다. 그의 최초의 음반 중의 하나는 후고 볼프 독집이었는데 시립 오페라 성악 코치였던 헤르타 클루스트(Hertha Klust)가 반주를 맡아주었다. 그 음반에는 이탈리아 노래들도 조금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중 두 곡이 이 컴필레이션 음반(CD2 23, 24)속에 포함되어 있다. 독일 가곡 외에 피셔-디스카우가 중점을 두었던 또 다른 초기 녹음은 바흐의 음악이었다. 1951년 그는 존경할만한 독일 지휘자이며 바로크 음악 전문가인 카를 리스텐파르트(Karl Ristenpart)와 함께 아르히프 프로둑치온에서 두 곡의 솔로 칸타타를 녹음했다. 피셔-디스카우는 “바흐의 영적인 부분과 감각적인 부분을 혼합하는 능력은 음악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어떤 것이다”고 한 인터뷰에서 진술한 바 있다. 바흐 해석가로서 그의 최상의 능력은 대부분 이러한 통찰에서 비롯된다. 물론 한 비평가(리처드 위그모어)가 그의 바흐 노래에 대한 특징을 “텍스트의 의미에 관한 심오한 탐구와, 겉보기에 거의 제한이 없어 보이는 호흡능력이 뒷받침 된, 목소리의 정연함과 유려한 부드러움”이라고 말한 부분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모든 것은 칸타타 82번(CD1 5)의 첫 아리아에서 들을 수 있다.
1951년에 피셔-디스카우는 빈에서의 첫 리사이틀을 열었다. 당시 피셔-디스카우가 자신의 일기에 썼듯이, 빈의 청중들은 여전히 리사이틀을 “일용할 양식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었다: “(독일에서) 전쟁 전에 활동했던 뛰어난 리트 가수가 공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더 악조건인 것은, 그래도 구색을 갖춰 만들었다는 레퍼토리 메뉴가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인기 높은 것들을 그대로 떠안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가곡들로 꾸며, 주로 시퀀스의 형태를 만드는 순수한 즐거움을 위해 그런 경향에 반대했다. 그래도 근원적인 문제는 센세이셔널리즘이나 오락을 기대하는 콘서트 청중들한테는 어떤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준비는 역시 완벽을 기하려는 연주 스타일에 맞춰졌다. 나는 형식의 모든 본질적인 특징들을 정당하게 인정해주고 싶었다. 다시 말해 나는 아무 것도 억압하지 않고 성악적 한계나 대중적 취미에 영합하지 않고 가곡 작품의 본질에 가까이 가고 싶었다. 내 임무의 초점은 가사와 음 사이의 오래된 투쟁에 맞춰져 있었다. 따라서 모든 작품은 그 스스로의 방식으로 해결하고, 모든 작곡가는 각각 다르게 강조점을 둔다는 말, 나는 그런 관련성을 충실하게 비쳐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의 경력은 물론, 자신의 동료 가수들에게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아는 가곡 리사이틀에서 보여줬던 지속적인 인상을 규정하는 예술적인 길을 선택하고 출발했던 것이다.
그런 길에 서서 내딛었던 또 다른 기다란 활보는, 기적적인 20년 예술적 유대를 시작하며 제럴드 무어와 첫 가곡 녹음을 단행했을 때에 이뤄졌다. 그 피아니스트는 피셔-디스카우가 지닌 예술성의 본질에 대해 즉각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한 프레이즈를 노래했을 뿐이었는데 나는 벌써 노래의 명수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건반 위에 내 손가락을 올려놓은 후 피셔-디스카우의 탁월함이 다른 모든 가수들과는 다르게 느껴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리듬이었다. 리듬은 음악 속에 있는 살아 있는 피다. 그런데 그는 그 피를 다루는데 명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은퇴했던 무어는 그 바리톤 가수의 경력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단일 프로젝트였던 남성의 목소리를 위한 슈베르트 가곡 전집(CD1 1-4, 16-20)을 베를린에서 녹음하기 위해 돌아왔다. “슈베르트 레코딩 기간은 항상 [제럴드와 나를]이끌었다...본질로 돌아가도록...나는 바로 편안함을 느꼈다. 심지어 새로 접하는 가곡들을 노래할 때도 그랬다. 나는 슈베르트의 표현 영역과 그의 예술적 감성에 연신 감탄했다... 슈베르트로 오기 전에는, 때때로 내 목소리가 가늘고 지나치게 확장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슈베르트에 와서 나는 아주 빠르게 풍성한 소리를 찾았다.”
레퍼토리를 이해하는 놀라운 능력은 피셔-디스카우의 트레이드마크 중의 하나였다. 또 다른 그만의 독특한 기법이 있다면 그것은 다기능 발성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1958년에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오페라, 가곡 리사이틀 그리고 오라토리오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지난 해 프로그램에 줄곧 올라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물어봤다: ”당신은...어떻게 하나의 유형에서 다른 유형으로 그렇게 빨리 옮아가며 그러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균등하게 기교적이고 효과적인 발성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확실히 캐릭터를 변화시키는 단기간의 능력과 같은 기술적 노하우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적인 적응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어 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