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억이 살아숨쉬는 시간의 여정. Long Story
2007-08-26
요즈음 세상에는 매 하루마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만들어 진다. 대중적인 문화매체
영역만을 한정해도 쉴 새 없이 출판되는 각양각색의 책들, 쏟아지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 개봉할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이 만들어지는 영화들, 이들 속에 우리는 허우적
살아가고 있다. 사람은 모두가 서로 다르기에 이처럼 다채로운 문화매체들이 제작되는
것은, 낙오되는 사람 없이 각 개인의 입맛에 맞는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닐런지. 그러나 왜 시간이 갈수록 작고 초라하며 외로워 지는 것일까
가볍게 말하면 너무나 풍족하였고, 조금 비틀어 말한다면 지나치게 넘쳐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발전하는 기술에 힘입어 음악은 매체가 아닌 무형의 파일 하나로도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굳이 공급과잉이란 경제법칙을 들먹이지 않아도 '외로움'의
큰 원인에는 점점 작아지는 음악의 가치가 분명 한몫을 하고있다. 아무도 돈을 들여
음악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 시대, 누구나 쉽게 자신을 아티스트라 칭하며 적당한
모조품으로도 세상에 알려질 수 있는 이 시대에 진정 찾아야 할 음악의 가치는 무엇인가
서두가 너무 거창했지만 전하려는 것은 단지 이 앨범에 대한 작은 감상일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고 여기에는 정확성과 보편성 그 어느 것도 담기 어려움을 알고 있지만
오랜만에 '말'을 해볼 만한 음악을 만났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사실 Anat Fort라는 아티스트를 전부터 알고 있진 않았다. 아마 그녀가 ECM이라는 명문
레이블에서 음반을 발매하지 않았다면 Anat Fort란 아티스트를 알 수 있었을지 전혀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보통 ECM에서 발매되는 신작을 거의모두 들어보는
나로서는 이스라엘의 여성 피아니스트라는 점이 처음으로 눈길을 끌게 한 것이리라.
그리고 드럼엔 익숙한 Eicher의 오랜 동반자인 Paul Motian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기에.
다른 것은 제쳐두고 수록된 곡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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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t Fort "A Long Story" Released in ECM
- Anat Fort (Piano)
- Paul Motian (Drums)
- Ed Schuller (Double-Bass)
- Perry Robinson : Clarinet, Ocar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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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01. Just Now, Var. I
: 앨범을 처음 플레이어에 넣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이 노래의 음들이 조용히 공기
사이로 스며든다. 잔잔하게 시작되는 피아노의 음색. 무어라 표현하지 않아도 이 트랙이
전체 음반을 일관하는 주제적 성격을 띠는 것임을 바로 직관하게 된다. 물론 제목의
뒷부분에 붙는 변주번호에서 주제란 느낌을 받게 되지만 이를 배재하더라도 이 앨범을
구입한 단 하나의 이유가 되는 곡을 찾으라면 주저 없이 이 트랙을 들것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민요에 대해서 별반의 지식이 없지만, 이 곡이 민요에서 왔음은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아직 어떤 음도 시작되기 전에 subdominant로 첫 음을 내딛은 후 바로
도약하여, 곡의 조성에 해당하는 tonic을 세 번 정박에 반복한다. 이 세 음의 반복이라는
리듬감이 이 곡을 지배하고 있고, 이 트랙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전체 음반을 일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이 세음의 터치사이에 들어가는 suspension이
음마다 그리고 나오는 구절마다 다른 것은 처음 이름을 듣는 이 여류 아티스트에 나를
몰입시킨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곡은 조용하고 따뜻하지만 그 이상의 포용력과 향수를 가지고 있다. 후에 Motian의
드럼과 Schuller의 베이스가 따라붙으며 더욱 마음 곁으로 가까이 오고 고요한 수면의
느낌을 준다. 수많은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민요인만큼 그들의 시간이 모두
잠들어 있기 때문일런지. 이 앨범에서 가장 깊고 충만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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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02. Morning: Good
: 앨범의 구성을 하루의 시간에 비유한다면 앞의 Just Now로 새벽의 시간을 열어
지금은 아침을 맞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밝고 쨍쨍한 아침의 시간은 아니다. 아직
어두운 새벽에서 아침을 여는 순간이라고 하면 어울릴까. 기본적으로 Major의 조성을
지님에도 이 곡이 아련하게 들리는 것은 그러한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곡은 멜로디와 여백, 그리고 메아리로 나뉘어져 있다. 주된 선율이 계속되는 피아노의
시간엔 오히려 저역의 반주는 피아노 자체의 그것보다 베이스에 맡겨지고 있으며,
멜로디가 나오지 않는 여백은 드럼이 채워넣고 있다. 또한 선율상의 메아리를 음역의
고저를 이용한 점이 탁월하게 훌륭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이런 설명보다 그저 느낌이랄까. 맑아지는 아침 바다 앞에 서있다면
꼭 이런 감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Bjornstad가 그렸던 것이 북구의 차가운 바다라면,
이 곡이 그리는 것은 한없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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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03. Lullaby
: 이제 시간은 아침을 지나 낮의 중턱으로 가고 있다. 온도는 높지만 그리 습하지 않은
낮의 시간. 보다 재즈풍의 선율을 가진 곡으로 베이스가 서두를 장식하며 이에 따라
클라리넷의 Robinson이 등장하고 Fort는 반주를 담당한다. 클라리넷으로 색소폰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Robinson 특유의 것인지. 소박하지만 부드럽고 늘어지는 부분의
표현이 매우 아르다운 곡으로 Fort가 재즈를 사랑하는 마음이 물씬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마음에 드는 곡으로 이를 따라 낮의 시간도 유유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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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04. Chapter Two
: 본래 한시대를 풍미했던 재즈의 묘미중 하나는 한없이 자유로운 공간으로 날아가는
그 느낌을 연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를 표현하는 데에 위트를 석는 아티스트도
아니면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아티스트도 있지만, 분명 이러한 곡은 다음 곡으로
넘어가기 전 긴장을 완화하는 좋은 interlude가 되어주는 것이 사실이다. 바로 이곡의 역할이
그러한데 Sculler와 Fort의 주고받는 대화가 너무나 위트있어 그간의 무거웠던 긴장을 적절히
완화시킨다. 그리고 다시 주제를 이야기하는 다음 트랙의 Just Now로 유연하게 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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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05. Just Now. Var II
: 첫 트랙의 Just Now를 피아노 솔로로 연주하며, 경과부에 반음계를 추가하여 재즈적인
느낌을 조금 주도록 변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만 도입부분의 동일 파트를 지나면 솔로
Improvisation의 진면목이 나오는데, Fort의 아름답고 유려한 즉흥연주를 잘 볼 수 있다.
후엔 다시 본래의 멜로디로 돌아가며 조용하게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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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06. Not A Dream?
: 이전 4트랙까지 이어진 곡들을 꿈과 기대의 시간에 비유한다면, 주제가 반복되는 5번부터는
현실의 시간에 들어온듯한 느낌이다. Not a Dream?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부터가 현실이겠는가.
베이스가 저음로부터의 심한 도약으로부터 상위의 피아노의 반주를 이끄는 그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Robinson의 건조한 목관 소리가 주된 선율을 진행시킨다. 하지만 여기에 일정한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이 마디로부터의 다음마디 까지가 지켜야할 유일한 약속이라고 해야할까.
아직 여기가 어디쯤인지 그것을 분간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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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07. Rehaired
: 아직도 감각은 현실에 존재한다. Eicher가 공간과 여백의 미를 극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면 이 곡의 공간감은 드럼과 베이스의 힘에 이끌린다. 피아노는 단지 음이란 요소를 연주할뿐
이곡의 주된 구성을 이끈다고 보기엔 어렵다. 오히려 드럼과 베이스가 채우는 여백에 이끌려
그 바탕위로 연주할수 있는 즉흥성을 최대한 구사하는게 특징이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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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08. As Two / Something Bout Camels
: 두 곡이 메들리로 진행되는데 먼저 시작되는 As Two는 자연스레 이전의 트랙에서 이어온
솔로 악기의 공간감과 즉흥성을 그대로 이어간다. 다분히 현대적인 기법의 곡들로 가볍게
말하면 실험성이란 이름으로 끝날수도 있지만 재즈라는 자유의 영역속에서는 그 의미를 한껏
발휘할수 있기도 하다. 여기서 자연스레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데 간결한 멜로디 라인이 곳곳마다
살아있는 곡이어 계속되온 즉흥 연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귀를 머물게 한다. 특히 Robinson의
오카리나 소리가 정말 묘하게 융합되는데 서로 전혀 다른 두 곡이 절묘하게 어울리는듯한
느낌을 준다. 이 곡을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여기서 특별한 인상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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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09. Not the Perfect Storm
: 제목의 느낌을 무척 잘 살린 곡으로 이전의 세곡에서 즉흥성이 다분히 강했다고 한다면
이전 트랙의 두번째 메들리에서 시작되는 간간히 삽입되는 멜로디라인이 이곡에 와서
가장 적합하게 정착한다는 느낌을 받게한다. 멜로디와 즉흥라인을 교묘하게 반복하면서
청자의 집중도와 자유도 양쪽을 모두 만족시킨다. 거기에 솔로악기의 화려함까지 살려내어
매우 완성도 높은 음악의 세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곡으로 이 곡을
끝으로 현실로 넘어왔던 낮부터 저녁까지의 시간이 모두 끝나고 이제 다시 밤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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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10. Chapter One
: 같은 제목의 interlude가 4번째 트랙에도 있었다. 오히려 그것은 2장 이었던것에 반해
1장인 이 곡이 더 나중에 나온것은 왜일까. 시간의 순환성을 고려한다면 본래 이 Long Story의
구성이 낮 시간으로 부터 출발한 것일수 있다고 느껴진다. 이러한 interlude들이 이전의
시간대를 마무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역할을 한다고 볼때 Fort의 솔로로 진행하는 이곡이
사실 여정의 첫페이지를 마무리하는 곡은 아니었을까? 피아노의 중역과 저역을 마치 서로다른
두개의 악기인냥 사용한다는 발상이 매우 뛰어나다. 이 곡을 끝으로 한껏 고조되었던 현실에서의
긴장을 마치고 밤의 음악으로 긴 이야기의 여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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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11. Just Now. Var III
: 드디어 하루가 저물어 가는 시간에 서있다. 피아노가 담당하던 멜로디파트는 Robinson
에게로 옮겨갔고, 음색의 끝부분을 이어가는 것이 상당히 절묘해서 마치 하모니카 적인
느낌을 받게한다. 기존엔 끊어서 연주되던 tonic의 반복이 흐들거리게 이어지며, Motian도
이에 맞추어 극적인 효과를 가미한다. 음악이 끝나는 순간 유려하게 이어졌던 하루 동안의
시간여행이 노을 너머로 조용히 사라진다.
적고 보니 설명을 위한 설명밖에 되지 못한 기분이지만, 무엇보다 직접 들어보면
이 앨범의 진면목을 느끼게 되리라 생각한다.
예전엔 청계천 시장과 남대문 일대를 모두 돌아 한 장의 LP나 CD를 쥐고 돌아와서도 그
렇게 행복했었다. 지금은 하루에도 수백여 종의 음반이 나오지만 그만큼 더 빈곤하게
느껴지는 것은 혼자만의 상념일런지.
자신에게서 좋았다는 설명만으로 타인에게도 훌륭한 것으로 인정받기란 어렵겠지만
이런 풍요의 시대일수록 옥석을 가려내야 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늘 내 주위를 맴돈다.
가을이 다가오는 시기.
바다 앞에서 Fort와 따뜻한 시간의 대화를 나누어 보는것은 어떻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