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르 뮌시가 지휘한 Berlioz의 "幻想 交響曲"의 울림
2012-11-30
샤를르 뮌시가 지휘한 Berlioz의 "幻想 交響曲"의 울림
지구의 심장에서 끓어 오르는 붉은 용암처럼
저 깊은 바다의 심장에서 사납게 포효하는 해일처럼
무명의 작곡가 시절, 思慕하던 여인에게 버림받은 베를리오즈의 애절한 사랑의 울음은 오늘 우리의 心琴을 울려주고 있는가.
"환상교향곡"의 예술혼이 인간의 精神史에 길이 남을 記念碑적인 작품으로 推仰받고 있는가? 異性間의 형이상학적 사랑인 연애가 우리 인간의 영혼에 그다지도 至大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대는 진정 알고 있는가?
연애가 自然啓示로서 근원자의 사랑의 손길 임을 그대는 진정 믿을 수 있는가.
우주의 중심, 인간 내면의 深淵에서 活火山처럼 솟구쳐 나오는 피의 絶叫,
그 절실한 신음은 세계를 갈망하는 생명에의 본능으로서 능히 傳說의 江에 魂의 눈물을 떨굴 수 있으리라.
거기서 비로소 絶對者의 손을 잡을 수 있으리라.
확신의 나라, 절대의 세계를 요구하는 梵我로서의 나를 진실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관능적인 몸부림에서는 결코 직관할 수 없는,
Platonic Love의 Idea 세계를 갈망하는 한 인간의 애절한 心魂은 정신을 일으키는 큰 물줄기로서 뭇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연인에게 버림받은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베를리오즈의 悲戀의 이 戀歌에 소리 죽여 울며 귀기울이리라.
죽음보다 더한 절망 속에서 처절히 몸부림치며 울리라.
思慕하는 여성에의 사랑은 자신의 窮極的 世界이기에
내 생명의 혼불을 일으키는 영원한 太陽이기에
本體의 영광이 表象된 그니 美의 實體는 바로 내 영혼이 居住할 絶對의 世界이기에,
그니 없는 삶은 바로 죽음의 世界이기에……….
葬送曲과도 彷彿한 베를리오즈의 失戀의 이 아픔을 들을 때면,
우리 또한 영혼 저 깊은 房에서 한 때, 오늘 이 시간에
부딛친 절망의 아픔이 아련한 추억으로 되살아나리라.
자신이 체험한 사랑의 世界를 생생히 살아 있는 言語,
살아 꿈틀대는 생명의 예리한 筆致로 세계를 향해 호소하는 音의 예술,
그 尖銳한 美의 철학은 듣는 이로 하여금 영혼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는 深遠한 감회에 사로잡히게 하리라.
音의 美學은 成文化된 死語가 아니다.
작가{作曲家}의 정신이 演奏者에 의해 되살아 날 수 있다는 데,
살아 숨쉬는 생명의 언어로,
심장이 박동치듯 살아 꿈틀거리는 우주의 언어로 빛나고 있다는 데 音의 매력이 있다.
音樂{Classic}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
듣는 자가 인정할 수 있는 音의 과학성,
형이상학의 세계와 연계된 音節, 音節의 철학성은 바로 世界를 딛는 인간 정신의 구조물로서의 믿음을 입증한다.
믿음에 입각한 소리의 철학은 精神現狀의 가장 尖銳한 예술이리라.
미술작품이 눈의 直觀이라면,
음의 예술은 청각의 직관으로서 完全을 지향하고 있다.
고매한 인격의 인간들은 물맛만이 최고의 정신으로 쳐주고 있지만, 인간이 진정 無色界의 空間에서 거주할 수 있을까?
참으로 거기에서 나의 영혼을 건져 올릴 수 있을까?
샤를르 뮌시의 이 교향곡 지휘는 차분하면서도 아늑한 音으로, 아주 강한 눌림 속에서, 눌리고 또 눌려 깊이 세련된, 힘차면서도 부드러운 여운의 울림으로 原作의 意圖를 맑고도 투명하게, 밤하늘의 별빛처럼 深遠한 음향의 美로 생생히 살려 내고 있다. 그렇게 우리의 心琴을 깊이깊이 울려주고 있다.
뮌시는 "베를리오즈의 Requiem"에서도 天上의 淸雅한 美를 더할 수 없는 예리하고 섬세한 손길로 創出해 내었었다. 玉의 티라면, 音이 좀 무거운 것이라고나 할까.
(2012.11.30/강대석< THOMAS AQUIN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