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뮌힝거가 지휘한 J. S. Bach의 마태 수난곡의 감동
2012-11-28
칼 뮌힝거가 지휘한 J. S. Bach의
『MATTAUS-PASSION』(DECCA/ADD)의 感動
Oratorio 양식으로 예수 크리스트의 수난을 그린 바흐의 『마태 수난곡』은 바흐의 기독교{유태교에서 파생한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비로소 그 생명을 굳혔다}신앙 고백이자 바흐 예술혼의 절정의 꽃이라 할 수 있다. 『마태 수난곡』에는 바흐의 웅휘한 예술혼, 숭엄한 예술혼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바흐는 이 수난곡을 통해서 예수의 죽음의 의미를 동시대인과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그의 화사하면서도 경쾌한, 그러면서도 비애의 색조가 짙게 밴 아름다운 선율로 길게 길게 설교하고 있다. 바흐의 음악으로 듣는 Kerygma{하나님이 예수 크리스트를 통해서 이루우신 인간 구원의 행위}는 우리 인간의 가슴을 봄비처럼 촉촉히 적시며 애절히 우리의 영혼을 뒤흔든다. 언어적 폭력 없이, 인간적 유대를 끊음이 없이도 메마르고 황폐한 우리의 가슴을 깊고도 깊게 속속들이 열어 젖힌다. 수난곡의 선율에 익숙해질수록 우리는 마침내 바흐의 영혼과 하나 되고,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회오와 찬미의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 천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바흐의 영혼과 마침내 극적으로 조우하게 되리라. 바흐는 세상의 수많은 영혼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신이 선택하신 위대하고도 고귀한 사자임이 분명하다.
생각하면, 하나님의 섭리의 원려는 깊고도 깊다 하겠다. 무미건조하며 지리멸렬한 대다수의 Protestant 목회자의 Kerygma 해설보다{Catholic 교회의 중심은 미사 중의 영성체 시간이며,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의 자질이 크게 문제시 되지 않지만, 개신교회는 사정이 다르다. Protestant 교회의 중심은 목회자의 설교인데, Protestant 교회의 생명은 목사의 자질에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위 은혜롭게 설교하는 목사는 개신교회에 그리 많지 않다} 바흐는 그 얼마나 훌륭하게, 조금의 구김살도 없이 어린 양의 피의 의미를 오늘의 우리에게 완벽하게 전달하고 있는가! 마태․요한 수난곡 등에서 예수의 죽음을 처절하게 애도하며 흘린 인간 바흐의 고귀한 눈물은 진정 인격화된 우주의 근원과 나를 합일시키려는 성결한 메타포metaphor로 승화 되고 있지 않은가! 이 세상의 인간이 자연적 삶에서 종교적 삶에로 변모할 수 있는 계기가 오직 크리스트의 죽음에 있음을, 크리스트에의 종속이 인간실존의 필연성임을 바흐는 이 수난곡에서 극명하게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바흐는 『마태 수난곡』에서 Kerygma의 의미심장한 의미를 자신의 고유한 선율의 철학에 담아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렇게 우리에게 접근하며 예수의 피의 의미를 우리에게 납득시키려 기나 긴 시간 동안 애절히 호소하고 있다.
『마태 수난곡』은 바흐의 기독교 신앙고백이자, 기독교의 실체를 전 인류에게 예술적으로 알리려는 위대한 시도다. 신은 이 일{수난곡의 태동}을 이루기 위해서, 천성적으로 쾌활한 바흐에게 그렇게도 아픈 일{첫 번째 아내의 죽음}을 획책하셨던 것이 아니었을가.
이 수난곡의 가사는 신약성서 『마태오 복음』 26장과 27장에서 가져왔으며, 수 많은 코랄과 아리아들은 중심 주제를 받쳐주고 밀어주는 숭고한 디딤돌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마태 수난곡』의 배경이 되고 있는 시기는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기념하는 최후의 만찬장에서 첫 영성체를 배풀고…겟세마네 동산에서 다가 올 수난의 두려움에 피땀 흘려 기도하며 고뇌하고…제자인 가롯 유다에게 배반당하고…유태 지배자에게 잡혀 조롱당하고…마침내 유태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때까지의 며칠간이다. 이 수난곡은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진혼 Missa의 성향을 띄고 있으며 아울러 마태 자신과 동료 제자들과 동시대인의 구원을 신에게 갈망하는 애절한 기도의 성격을 띄고 있다.
우리가 처음 이 곡을 듣게 되면 중심부가 어디에 있는지, 주제가 무엇인지 가늠하지 못해 어리둥절하게 된다. 길고 긴{연주시간 3시간 여} 곡이기 때문에 인내심을 갖고 수 차례나 꾸준히 참을성 있게 들어야 비로소 윤곽이 잡히게 된다. 그림을 그릴 때 각 부분이 자리할 위치를 먼저 스케치하는 것처럼 우선은 곡 전체의 흐름을 먼저 파악해 두어야 한다. 비록 긴 곡이라 하더라도 여러 차례 듣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악곡의 흐름이 잡히게 되고, 일단 곡의 윤곽이 잡히고 나면 음절과 음절의 이음새, 멜로디와 멜로디의 연결이 창출해내는 소리의 의미, 작곡가가 악보에서 의도한 생각이나 사상, 철학이 감지된다. 이 감성 작용은 마치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어 가노라면 자연의 정경과 아울러 인물의 성격과 심리, 사건의 추세가 차츰차츰 선명히 잡히듯 그렇게 음의 추이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감성작용은 상대적이다. 나의 내부에 숨어 있는 어떤 것, 숨겨진 나의 내면의 세계가 외부의 끊임없는 자극에 의해서 도출될 때,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감응하게 될 때, 그렇게 나의 내면이 그 세계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자극 요소와 하나가 되고 마침내 그 세계를 인정하게 된다. 나의 내면의 세계가 비로소 열려 Bach의 주제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바흐의 슬픔이 나의 슬픔으로, 바흐의 비탄의 신음이 나의 신음으로, 바흐의 애도가 나의 애도로, 바흐의 구원에의 갈구가 나의 기도로 합일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작곡자의 정신과 일치를 이룬다. 문학 감상이나 음악 감상, 이성과의 연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마태 수난곡』을 들을 때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바흐의 영혼과 점점 가까워지게 되리라.
나는 Record 시절에 이 음반{칼 리히터 판}을 사서 몇 번 듣다 말았는 데, 그 후에도 오랫동안 내버려두고 듣지 않았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듣기 시작하여 이제는 어느 정도 이 수난곡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정서에 공감하는 자세가 되었다고나 할까. 아뭏든 이제 내 가슴에는 『마태 수난곡』이 감동적으로 와 닿는다.
세계의 유수한 음악인들이 한결같이 격찬하고 있으며 음악 애호가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은 『마태 수난곡』을 제5 복음서라고까지 칭송하고 있는 데도 Classic 팬 중에는 아직 이 곡의 진가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일전에 나는 일류대를 나와 치과를 개업하고 있는 한 지기에게 이 곡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었는 데, 반응이 시큰둥했다. 이 사람은 예전의 나 같이 그저 한 두 번 들어 보았거나, 그것도 아마 끝까지 다 들어보지도 않고 내팽개치고 말았으리라. 어떤 사람은 오페라나 성악곡을 들을 때, 번역된 대본을 펼쳐가며 듣기도 하는 데, 우리는 이 긴 곡의 구절구절의 뜻을 자국어로 번역해 가며 듣거나 전문가 수준으로 분석하며 들을 필요는 없으리라.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저 물처럼 흐르는 악상의 분위기에 자신을 내맡겨 우리 내면에 호소하는 멜로디의 흐름에 젖을 수만 있어도 얼마나 좋은가. 세계 공통어인 음악의 세계에선 언어가 달라도 감정의 교류에는 전혀 지장이 없으리라. 더할 수 없이 세련된 음의 미로 점철된 수난곡 악상의 조화로운 선율을 듣고 들으면서 한 겹씩 한 겹씩 벗겨져 나가떨어지는 무딘 신경조직의 파편들을 뒤로할 때마다 우리는 본연의 자세를 가다듬고 세계의 가장자리에 벌거숭이 자신을 점점 들어 내 놓을 수 있으리라. 바로 거기에서, 모든 세상사를 벗어난 우주의 공의 벌판에서 우리의 영혼은 생명의 언어, 부활의 언어를 추출해 낼 수 있으리라. 우주본체에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예술활동에 어떤 목적의식을 갖는 다는 것은 어부성설이겠지만, 인류 역사에서 가장 심오하고 심각한 사건인 예수의 죽음에 관한 문제이니 우리는 뚜렷한 주제의식을 갖고 『마태 수난곡』을 들어야 하리라.
인간이 예술활동에 참여하려는 욕구는 완전한 미에로의 지향 심리 때문이다. 미의 추구에서, 미의 세계에서 우리의 설자리를 마련하려는 순수한 본능 때문이다. 완전의 미에 가까워지면서, 완전의 미 안에서 생명 본래의 길을 걷고자 하는 본연의 욕구 때문이리라. 아름다운 세계의 추구, 미에의 끝없는 집착은 근원자에 대한 예의일까? 인간의 탐미 심리는 그 정점에 도달할 때까지 끝이 없다. 비단 음악, 문학, 미술에서뿐만 아니라, 생활에서의 언어, 인격, 성, 연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생활에서 미는 진정한 생존의 필수요건으로 요구된다. 미는 가장 자연적인 것, 가장 고귀한 그 무엇으로, 우리가 닿아야 할 확신의 나라, 절대세계의 표상이며 본체의 핵 그 자체인지 모른다. 완전의 미는 생명체 본연의 근원적인 욕구인 궁극의 세계, 궁극의 실체에 닿음인지도 모른다. 근원자, 절대자의 정체는 바로 완전한 미의 실상인지도 모른다. 그럴 것이 우리는 완전의 미에서 무한한 감격과 기쁨, 감동을 받고 있지 않은가.
미술가는 고려 청자의 단아하고 청아한 미, 은근한 깊이가 밴 조선 백자의 자연 신비의 미, 고찰의 숭엄한 미에서, 남성은 인간의 정신을 뇌쇄시키고야 마는 미의 정점인 여성의 미{여성미의 본질 및 중요성은 미 그 자체보다는, 그 미에서 추출할 수 있는 미의 배후 세계에의 기대 때문이리라}에서 존재의 거점을 발견하려 한다.
우리가 바흐의 『마태 수난곡』에 압도되어 경탄과 찬탄의 마음을 금치 못하는 것은 그 주제 때문이 아니다. 바로 바흐 음의 절대미학 때문이다. 미가 바로 『마태 수난곡』의 주제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가에게 있어 미는 생명 그 자체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철학을 살리는 데는, 그 주제를 담을 그릇인 미는 필수부가결한 절대적 요소이다. 바흐 음의 미학, 그 선율의 경향은 그의 가정생활이 행복했기 때문이었는지 밝고도 화사하다. 주제가 무거워도 그렇게 무겁지 않게 듣는 이에게 어필한다. 바흐의 선율은 화창하면서도 아름답고, 활기에 넘쳐나고, 희망찬 메시지를 가득 넘치게 담고 있다. 바흐의『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부활절 오라토리오』,『마니피카트』등을 들어보라. 그 얼마나 화사하고도 아름다운가! 연잎에 물방울이 굴러가듯 그 얼마나 영롱히 빛을 발하는가!『B 단조 Missa』에서도 Bach의 색채 때문인지 어두운 구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마태 수난곡』의 주제는 무겁고 어두운 것이지만, 바흐의 손길에서 울어나오는 그 어두움은 여명의 어둠이랄까 그렇게 캄캄하지가 않다. 슬픈 색조를 띄며 비애에 젖어 있는 수없이 많은 수난곡 선율의 미학은 분명히 우리 자신을 이 세상과 결별시키는 위대한 힘을 내포하고 있다. 바흐의 주제는 바흐 자신이 창출해 낸 미의 힘으로 그렇게 강력히 우리에게 다가온다.
J.S.BACH의 이 수난곡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절대의 신 야훼가 창조주와 구속자로서의 부드럽고도 그지없이 아름다운 손길로 세상의 어둔 마음을 어루만져주시는 은총의 복음이 틀림없으리라.
우리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에서 죽음에 직면한 인간 예수의 고뇌를 알 수 있고,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바흐의 애닲은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어린 양의 영원한 안식을 신에게 비는 인간의 절대기도를 바흐 음의 미학으로 들을 수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예수의 고뇌에 대한 바흐의 고통에 찬 신음,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바흐의 통절의 마음, 사자 예수의 안식과 부활을 신에게 빌며 만인이 여기에 동참할 것을 애절히 호소하는 인류 일대의 춘사를 바흐의 고귀한 음의 미학, 위대한 음의 철학으로 속속들이, 감명 깊게 실감할 수 있다.
이 음반도 지휘자를 잘 가려서 들어야 할 것 같다. 몇몇 지휘자의 음반을 들어봤으나 칼 리히터[Gram]나 마우엘스베르그[berlin classics], 칼 뮌힝거[decca]의 지휘가 내겐 제일 마음에 들었다. 이 음반은 녹음 상태도 좋은 편이다. 특히 청순하면서도 애수가 깃든 소프라노 Eily Ameling의 청아한 목소리와 인간의 내면 저 깊은 곳에서 심중히 울려나오는 테너의 성악미는 무척이나 감동적이었다.
세파에 시달리며, 생활에 파묻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크리스트의 수난은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크리스트의 수난이 나의 죄과로 연유되었음을 우리는 의식하고 있었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가 올 고난을 예견하며 피땀 흘리신 크리스트의 고뇌에 우리는 얼마큼 접근했던가. 여전히 우리는 영혼의 마비 상태에서 어제를 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영성체하면서 우리는 성체가 진정 크리스트의 살과 피임을 인식했던가!
작고한 프랑스 문화상 앙드레 말로는 말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신이라고 믿으면 크리스쳔이지, 믿지 않으면 크리스쳔이 아니다.
바흐의 두 번째 부인 안나 막달레나 바흐는{헌신적이었던 바흐의 첫 번째 부인은 30대 중반에 죽음}『내 남편 바흐』에서 이 수난곡의 위대성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태 수난곡』과『요한 수난곡』,『B 단조 미사곡』은 한 개인의 영혼이 만든 최대의 걸작입니다.………수난곡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어떤 설명도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모든 설명은 헛될 뿐입니다. 이 수난곡은 제바스티안의 가슴 깊은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신의 고뇌와 회개 없이는 크리스트의 상처와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는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면서 이 곡을 썼던 것입니다. 바로 그의 괴로움에서 모든 수난곡에 흘러넘치는 감동적인 아름다움이 탄생된 것입니다.
『서양음악사』의 저자인 Grout and Palisca도 바흐의 위대성을 극찬하고 있다.
『마태 수난곡』의 거의 모든 악구들은 회화적인 음형과 표현적인 효과를 융합시키는 바흐의 천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위대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인간성이 짙게 밴 『마태 수난곡』은 바흐 생존 중에 몇 차례 상연되었으나, 그 후 망각의 무덤으로 묻혀버렸으며 거의 잊혀져 있었다 한다. 이 수난곡을 신앙심 깊게 받아들인 청중도 많았으나, 당시 권력층에 있던 귀족층에게서는 반응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불멸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한 번은 무덤 속에 묻히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 있다.『마태 수난곡』은 오랫동안 무덤 속에 묻혀 있었으나 멘델스존에 의해 재발견되었으니 우리 인류 정신사에서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12. 11. 28 ; 강대석(THOMAS AQUINAS)>